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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분의 뜻을 깨달아 알고 존재의 목적을 따라 살 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한 자아,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 행복한 사회, 행복한 나라, 행복한 세계를 그리어 봅니다. 우리 모두 함께 꿈꾸는 자가 됩시다.
david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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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24. 12:43 기본카테고리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다.



6강 "평등 옹호" - 존 롤스 편을 보면서 함께 나누고 싶은 대목을 인용해 본다.



'롤스는 성공에 이르는 사회적, 경제적 장벽만 제거된다면 누구나 재능이 선사하는 포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 위주 사회의 기본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것을 비판한다.



"우리는 사회에서 맨 처음 주어진 출발선은 당연히 내 몫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듯이, 내게 분배된 타고난 재능도 당연히 내 몫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능력을 갈고 닦게 만드는 내 우월한 성격은 당연히 내 몫이라는 생각 역시 문제가 있다. 그러한 성격 형성에는 어렸을 때 좋은 가정과 사회 환경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그러한 영향은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격이라는 개념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롤스는 분배 정의가 미덕이나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보다는 게임의 규칙이 정해졌을 때 생기는 합법적 기대를 충족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일단 정의의 원칙이 사회 협력의 조건을 정하면, 사람들은 그 규칙에 따라 자기가 벌어들인 이익을 가질 권리가 생긴다. 그러나 조세제도에 따라 수입의 일부를 내놓아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써야 한다면, 자신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빼앗긴다고 불평할 수 없다.



롤스는 '정의론'에서, 1980년에 자유시장 경제를 힘차고 당당하게 외친 '선택의 자유'의 저자 밀턴 프리드먼의 견해에 반영된 자기 위안 식 조언; 평등주의자들의 반박에 맞서 자유방임 원칙을 옹호하면서 우리가 그런 불공평을 수정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며, 그 보다는 그 불공평하고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하고,그 결과 생겨나는 이익을 즐겨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그는 격앙된 어조로, 우리가 잊기 쉬운 익숙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능이 분배되는 방식과 사회 환경의 우연성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제도를 강제하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있게 마련이며, 그러한 부당함은 인간의 합의에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 더러 부당함을 간과하는 구실로도 이용되는 그 주장은 부당함을 묵인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와 똑같이 취급한다. 자연의 분배 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타고나는 요소 일 뿐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롤스는 우리가 그러한 요소를 다룰 때,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자고 제안한다.



롤스의 정의론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이론은 미국 정치철학이 아직 내놓지 못한, 좀더 평등한 사회를 옹호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임에 분명하다.'



2012년 총선, 대선을 통해 그 어느 때 보다 치열한 정책적 대안이 제기 될 것이고, 엄청난 복지 정책이 쏟아져 나올 터, 그 근간에는 평등, 정의에 대한 해석과 이를 실행에 옮기는 방법론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존 롤스가 말한대로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한다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언합의인 사회계약을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아이패드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david lim